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호라즘 왕조 (문단 편집) ==== 무함마드 2세 치세 ==== 무함마드 2세의 군대가 자그로스 산맥에서 철수하던 1218년 시점에 하필이면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이 [[쿠츨루크]]의 목숨을 빼앗고는 서요를 멸망시키면서 호라즘 제국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시기 무함마드 2세와 칭기즈 칸의 의도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3명의 사신과 자신의 친서를 대상을 통해 보냈는데, 호라즘령 [[오트라르]]의 '아미르'(영주)이자 샤 무함마드 2세의 외가 친척인 이날추크(غایرخان)[* '이날축', '이날치크' 등으로도 표기된다. 가끔은 '''이날죽'''으로도 발음된다.]가 칭기즈 칸이 보낸 사신과 무슬림 대상들을 살상했다. 살상한 이유를 두고 라시드 앗 딘은 당시 이날추크가 '''가이르 칸'''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칭기즈칸이 보낸 상인 가운데 가이르 칸과 친분이 있었던 힌두인이 한 명 있었고 이 힌두인이 어린 시절 친분과 칭기즈 칸의 위세를 믿고 가이르 칸을 본명인 이날추크로 막불렀다는 것이다.[* 칭기즈 칸 위인전이나 일부 도서에서는 해당 부분은 삭제되었으며 대다수가 칭기즈 칸의 위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오트라르의 영주가 몽골 사신들의 금은보화에 눈이 멀어 이들을 전부 죽인 뒤 이를 차지했다며 칭기즈 칸의 호라즘 원정 명분을 지지하는 서술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 부분이 언급되었더라도 금은보화를 빼앗고 몽골 상인들을 죽이며 전쟁의 빌미를 준 건 이날추크의 과가 맞다.] 이에 가이르 칸은 무시당한 분노와 상인들의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몽골인 상인들을 감금한 뒤, 샤 무함마드 2세에게 상황을 알렸고 무함마드 2세가 칭기즈칸 사절단의 처형을 명령했다고 주장한다.[*출처1-2-2-2-5 라시드 앗 딘, 집사, 2권 칭기즈칸 기, 2편 2장 5절] 행군 루트나 전시의 계산적인 학살 및 파괴 행위를 보면 이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고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몽골이 최우선으로 노리던 건 인근의 서하나 금이었지, 멀리 떨어진 호라즘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간신히 탈출한 대상으로부터 정황을 들은 칭기즈 칸이 오트라르 영주의 처벌에 대한 항의성 사신을 다시 보냈지만 무함마드 2세가 직접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수염을 깎아 돌려보냈다. 칭기즈칸과 무함마드 2세 둘 모두 상대를 만만치 않은 세력이었고 척을 지지 말자는 강국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무함마드 2세의 모욕에 노한[* 수염은 남성성의 상징이었으니, 사신의 수염을 자른다는 건 외교석상에서 대놓고 "닥쳐, 불만 있으면 덤벼보든가."라고 외친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특히 무슬림, 당시시대 남성에게는 수염을 깎인다는 건 굴욕 of 굴욕이었다.] 칭기즈 칸이 호라즘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 병력을 동원해 침공했다. 무함마드 2세는 아들 루큰 앗 딘에게 본토 수비를 맡긴 채, 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호라산, 사마르칸트, 잔드를 거쳐 투르키스탄 국경 지대까지 향한 뒤 킬리 강과 카임치 강 사이에서 몽골 군대와 대치했다. 당시 무함마드 2세가 대치하던 몽골 군대는 [[수부타이|수베데 바하두르]]와 토가차르의 군대였는데 원래 이 부대는 (잔당 토벌 임무를 받고) 쿠두를 치기 위한 군대였다. 무함마드 2세의 공격에 상황 파악이 덜 된 몽골군은 일단 한 발 물러나 '우린 칭기즈칸의 명령을 받지 않아 호라즘과 싸울 의향이 없다'고 밝혔지만 무함마드 2세는 무시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호라즘 군대는 역으로 포위되어 무함마드 2세까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무함마드 2세는 아들 잘랄 앗 딘의 활약으로 간신히 탈출해 사마르칸트로 귀환했다.[*출처1-2-2-2-5 라시드 앗 딘, 집사, 2권 칭기즈칸 기, 2편 2장 5절] 몽골군의 위력을 본 무함마드 2세는 전면전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며 수비 태세로 들어가려 했지만, 몽골 군대는 호라즘 측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속도[* 이는 몽골초원에서 태어난 군마들의 특유의 보법이 있었으나 몽골군은 한 기병당 준비해둔 예비용 군마로 갈아타면서 기동력을 유지하였다.]로 진격하여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에 들이닥쳤다. 이 때문에 호라즘 군대는 몽골 군대에 비해 숫자도 적으면서 각 도시에 분산 배치되어 각개격파당했다. 오트라르와 구르간지에서는 몽골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그 외에 사마르칸트, 부하라, 발흐, 마르브, 니샤푸르 등 호라즘 측의 주요 대도시들이 몽골 제국에 편입되었다. 전쟁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오트라르 영주 이날추크는 오트라르 성이 함락된 후 몽골군에 생포되었고, 칭기즈 칸이 탐욕에 멀은 성주이니 그에 걸맞게 죽이겠다며 두 눈에 [[금]]을 녹인 물을 들이붓는 끔찍한 방식[* 일각에서는 은을 부어 죽였다고도 하고 어떤 매체에서는 녹인 금이나 은을 두 눈과 목에 부었다고도 한다. 어느 방식이든 간에 매우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으로 처형시켰다고 전해진다.[* 2005년에 한국 지상파를 탔던 [[칭기즈칸(드라마)|드라마 칭기즈칸]]에선 끓는 [[수은]]을 부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소설 천년영웅 징기스칸에서는 금을 녹여서 눈과 귀에 부은 다음 마지막에는 입 안에 금을 부어서 죽인 것으로 묘사했다.] 당시 호라즘 군대의 구조는 중세 튀르크-페르시아 제국들의 전형적인 형태로, 군주와 유력자들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굴람([[맘루크]])들이 소수 상비군 겸 정예부대가 되고, 유사시에 다수의 기병을 빠르게 동원할 수 있는 유목 부족 집단들이 군대의 주력을 맡는 구조였다. 호라즘 왕국에서 이 주력부대의 역할을 맡은 것이 앞서 언급했듯이 무함마드 2세의 부왕 테키쉬가 테르켄 하툰과 결혼하면서 끌어들인 튀르크계 킵차크 부족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부족 출신인 [[테르켄 하툰]]의 명령을 더 우선시했고, 테르켄 하툰은 아예 국왕인 무함마드 2세의 궁정과 별도로 자신의 궁정(divan)을 차려서 왕의 명령조차 모후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전쟁의 원인이 된 오트라르 영주 이날추크도 테르켄 하툰의 친족이었다. 게다가 상술했듯이 정복당한 지 얼마 안 된 지방 주민들은 호라즘 세력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기 때문에 주요 대도시와 거점에 주둔한 병력을 완전히 뺄 수도 없었다. 이런 사정들 때문에 호라즘은 몽골의 공격에 반격다운 반격을 거의 해 보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가 격파당했다. 결국 단기간에 제국의 심장부와 군대 상당수를 잃게 된 무함마드 2세는 그나마 전란을 피한 이란 서부 지역을 돌면서 병력을 모아 보려고 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카스피해]]의 한 섬에서 폐렴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죽었다. 다음 왕위는 무함마드 2세와 함께 있던 아들 '''[[잘랄 웃 딘 밍부르누]]'''(1220 ~ 1231)가 이었다. 한편 무함마드 2세를 쫓던 몽골의 추격대는 추격 도중 러시아인들의 땅까지 도달하는데 이것이 이후 깊은 악연을 맺게 된 [[러시아]]와 몽골의 첫 대면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